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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2/16 03:03
얼마 전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08년 10월 5일 스탠포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에서 졸업 축사로 한 연설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스티브 잡스는 애플(Apple)의 경영자로서 매킨토시, 아이폰, 맥북 등으로 세계의 IT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아이폰은 젊은이들의 필수품이라고 할만큼 우리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나는 스티브 잡스에 대해서 평소 큰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그의 연설을 통해서 그의 비범함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연설은 패배감에 잔뜩 웅크려 있던 내 정신에 불을 붙이는 연설이었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Connecting the dots)"에 관한 것이다.
점을 잇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인생의 경험과 지식의 총체들을 서로 연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것들에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등-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나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내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출처
실제로 그의 인생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를 낳은 미혼의 부모는 그를 낳자마자 다른 부부에게 입양시켰다. 그는 대학에 갔지만,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어 대학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 결정을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한다. 왜냐면, 그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생각하고 들었던 서체(Typography)에 관한 교양과목이 훗날 매킨토시(Macintosh) 컴퓨터의 아름다운 서체를 개발하는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내 인생은 서로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너무나 이질적인 점들로 채워져 있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을 존경하여 물리학과 수학에 빠져 지냈다. 하지만, 대학 시절에는 물리학의 한계를 느껴, 학업을 등한시하고 종교와 형이상학적인 진리탐구에 몰두하였다. 석사과정 동안에는 컴퓨터 비전 및 동영상 신호처리를, 지금 박사과정에서는 뉴로이미징(Neuroimaging)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이질적인 경험들이 어떻게 서로 하나로 엮일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는 말한다. "그 이질적인 경험들이 결국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로 연결될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라."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한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질적인 점들은 하나의 점으로 점점 모일 것이다. 물론, 그 점들의 이질성(heterogeneity)이 크면 클수록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기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나아가다 보면, (스티브 잡스의 경험에서 보는 것처럼) 그 점들의 집합이 만들어내는 창의성은 더 놀라운 결과로 나타날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점의 수렴이 어디에 있는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 지점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처럼 너무 높고 뿌연 안개 속에 가려져 있어 내 머리 속에 명확한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대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단계 나아가야 할 지점을 정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머리 속에 그리는 일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love and loss)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애플이라는 회사를 창업하여 10년동안 큰 회사로 성장시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여겼고 그가 느낀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여전히 나의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공에 대한 부담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애플에서 해고된 일이 결국 인생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NeXT와 Pixar라는 회사를 창업하여 성공했고, 애플이 그 회사를 사들임으로써 애플로 다시 복귀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중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두려운 시험약이었지만, 환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나를 이끌어간 유일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에서도 같습니다. -출처
사실 나도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통하여 타의든 자의든 수많은 상실을 겪어야만 했다. 앞서 내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물리학자로서의 꿈을 스스로 접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나는 어떤 민족종교를 우연히 접하게 되어 학업 마저도 등한시 하고 수년 동안 신앙활동에 몰두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내가 회의감을 느끼고 그 종교로부터 나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엉망이 되어버린 대학 성적표였다. 나는 완벽한 실패자였다.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당시 나를 일으켜 세운 한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는 잊자. 대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막노동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일자리를 열심히 알아본 결과 나는 한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엔지니어 경험은 연구에 대한 강한 의욕을 불러일으켰고, 대학원에 진학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경험했던 상실은 작년의 유학 실패였다. 석사과정을 시작한 이후 유학을 추진했지만, 결혼을 하여 아기까지 낳게 되면서 유학의 꿈은 도리어 강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이미 가족과 친지들에게 유학을 준비한다고 공언한 터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독일의 어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지도교수는 내게 한 푼의 장학금도 주지 않았고 심지어 연구를 위한 컴퓨터마저도 지급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 교수 밑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커다란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유럽에 버려진 쓰레기와 같았다. 이제 짐싸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유럽이라는 벽이 너무나 높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이 좌절감을 극복하게 한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찾아서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마치 스티브 잡스가 느꼈던 것처럼 "성공에 대한 부담감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벼움"으로 변화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여러 군데를 지원했고, 영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좋은 연구소로부터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높다고 느꼈던 세상의 벽이 조금씩 뚫리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는 지금 독일의 Leibniz 연구소에서 뉴로이미징을 연구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석사과정 때 했던 동영상 신호처리 및 컴퓨터 비전과는 상당히 다른 연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현재 연구주제는 fMRI로부터 뇌의 기능성 연결구조를 분석하는 일인데, 이는 사실상 내게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새로운 분야라서 사실 매우 망설였지만, 하면 할수록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고 전망이 있는 연구분야임을 깨닫게 된다. 결국, 유학 초기의 실패는 내게 새로운 분야를 도전하도록 하는 변화의 계기가 된 셈이다.
이와 같이 상실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과 변화의 계기가 된다. 앞으로 만들어 갈 나의 삶에서도 상실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상실은 곧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의미함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마지막 이야기는 죽음(Death)에 관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 연설을 하기 1년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그에게 3~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이 경험을 통하여, 그는 시간의 소중함을 더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출처
얼마나 내 가슴을 저미게 하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기가 없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님, 가족 부양에 책임을 다하기를 바라는 아내 등 주위의 강한 기대와 시선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의 궁극적인 관심은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기대를 먼저 충족시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나 자신이 진정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못하는 것에 분노하기도 했고, 벗어날 수 없는 고삐에 매여있는 소처럼 좌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외침은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에 강한 경고가 되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 그는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방법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할까?" 그리고 여러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는 것으로 이어질 때, 나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처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 과연 지금 하는 일- 즉 연구활동을 계속 했을까? 사실 연구활동 자체만 생각한다면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오히려 그 대답을 "예스"라고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일을 하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것을 발견할 때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훌륭한 관계에서 처럼, 그것은 해가 지나면서 점점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십시오. 주저앉지 마십시오. -출처
아직 훌륭한 일을 찾지 못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함으로써 결국은 가장 훌륭한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게 주어진 이 연구활동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내 인생의 점들이 궁극적으로 모이는 수렴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하는 연구활동이 아니라 궁극적인 수렴을 향해 나아가는 살아있는 연구활동이 되어야 한다.
물론, 죽을 때까지 그 수렴점을 결국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수렴점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그 길을 향하여 내 모든 것을 다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온 이질적인 점들이 먼 훗날 또는 가까운 훗날 퍼즐처럼 하나로 맞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질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맞추어진 조각들이 결국 다음 의문을 설명하는 그림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존재하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
우주는 무엇이며 우주는 왜 존재하며 우주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보도록 권해주신 와이즈만 영재교육 연구소 초등과학팀장 박성미( @cherrytree519) 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박성미님은 제자들로부터 퇴임 기념 콘서트를 헌정받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갖고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아름다운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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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2/08 00:23
어제 와이즈만 영재과학 연구소에서 초등과학팀장으로 일하시는 박성미( cherrytree519)님과 트위터에서 비폭력(Nonviolence)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치관이 공격받을 만큼 힘든 상황에서 비폭력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소중한 대화였습니다. 또, 좋은 교사가 되려는 아름다운 꿈을 지닌 박성미씨를 만나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나: 전도를 위해서라면 폭력도 마지않던 기독교. 이를 비판했던 톨스토이가 교회로부터 파면당했지만, 그 정신이 간디에게 영감을 주어 비폭력 저항이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http://bit.ly/bHbomw
Park: 유원상님, 비폭력에 대한 글 읽었어요. 저는 영화 '아바타'의 전투씬 보며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나를 내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 만약 누군가 내 가족이나 조국을 해하려 든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막아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쓰는 건 어떤 경우에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Park: 저는 그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답니다. 가족을 위해, 종교적 신념을 위해, 그 둘이 다른 걸까요?
나: 가족을 위해 폭력을 쓰는 것은 인간적인 과오로 끝날 수 있죠. 하지만 종교적 신념, 즉 하느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기만적이며 양심과 하느님을 해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Park: 저는 영화 아바타 본 후 비폭력에 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이상하게도, 웹에서 사전을 찾아 보았는데, '비폭력'을 검색해 보니 '아힘사'라는 단어가 뜨더군요.
나: 아힘사(Ahimsa)는 간디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해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면서 유명해진 용어라고 알고 있어요.
Park: 그 설명 중 재미있었던 것은 (폭력을 행사할 때) 상대방의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며, 그것이 나에게 업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었답니다. 육체적 위해 뿐 아니라, 정신적 진보 역시 방해하며 그것이 내게 되돌아 온다.
가치관이 충돌될 때 사람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폭력의 행사이죠. 제가 같다고 본 것은..가치관의 충돌이라는 점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랍니다.
나: 비폭력이 좋다는 건 알지만 생활에서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억울한 일에 대한 분노 등이 마음에 남아 날카롭게 되기도 하구요. 결국 내 마음 하나 다스리기도 어렵더라구요.
Park: 원상님에게는 종교가 매우 큰 가치인 것 같아 보여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런데 재미있는 건 십자군 전쟁처럼 원상님과 어쩌면 똑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였으나, .행동은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죠. 재미있지 않나요?
나: 진정한 신앙은 결코 폭력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어요. 십자군 전쟁이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보이는 폭력적 신앙은 이기주의일 뿐 참다운 겸손과 사랑은 없죠. 진정한 신앙은 사랑이 아닐는지...
Park: 원상님이 분노한 그들. 종교적 신념 때문에 폭력을 사용한 그들도 원상님과 같은 고백을 한다면, 받아들이실 수 있나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성경의 한 구절인데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저는 이 말을 여러 번 곱씹고 음미해 본답니다. 정말 사랑이 가장 중요?
나: 저에겐 사랑이 가장 소중한 가치로 다가오네요. 그런데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종교적 믿음으로 내 가족을 해한다면, 내가 과연 그들을 진정 사랑할 수 있을지...
Park: 영화 잔다르크를 앞부분까지 보았는데.. 그 중 소녀 잔다르크가 영국군이 자신의 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엄청난 눈물을 흘리며 소녀 잔다르크는 목사님에게 절규하죠.
'원수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이 영국군들도 제가 사랑해야 하나요?" (세부인 대사는 제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 있어요.) 아.. 저는 그 대목에서 정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 이후 영화를 더 보지 않고 (IPTV라서 중간까지만 보았다가 이어 보기가 가능해서) 잔다르크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합일, 신부님께 들을 말씀과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혼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 잔다르크의 절규하는 장면, 상상만해도 눈물이 나네요. 그럼에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이죠.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죽을 수 있다면 참된 신앙인 것 같아요.
Park: 제가 왜 이토록 비폭력에 관심이 많은가하면, 제겐 가치의 충돌 일어날 때 나와 남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모든 것이 폭력이라고 보여지는데, 제가 아주 자주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거대한 가치관의 충돌이 발생했는데, 저는 지금 거대한 폭력을 행사하기 직전 상태인지로 모르겠어요. 저와 가치관이 다른 분들에게.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하게 되네요. 생각이 아닌 기도가 필요한 단계?
나: 가치관의 충돌이 생길 때 해결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폭력에 의하지 않고도 해결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Park: 물론 제가 십자군처럼 물리적 폭력을 쓰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말의 폭력, 사고의 폭력을 제가 많이 쓰게 될까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미소로 저와 가치관이 다른 그분들을 감쌀 수는 없는걸까요.
Tolerance, 관용, 포용.. 제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것인 듯 해요.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 분들 생각을 내 생각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듣고 싶은데 그것이 힘들어서요.
나: 관용, 포용, 정말 쉽지 않죠. 저도 사실 종교적 신념이 달라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있거든요. 당장 나에게 손해가 온다고 생각하니 자존심도 상하고 그러더군요.
Park: 원상님.. 진지하게 대화 나누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가치관과 가치관의 충돌. 정말 여러 군데에서 목격하게 되고 겪게 되는 일이죠. 많은 생각하게 되네요.
나: 성미님과 대화하면서 저도 반성하게 되네요. 먼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할텐데요.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나네요. (마5:24)
Park: 한 인간이 온전한 합일, 생각과 행동의 일관성 갖는다는 거 참 힘든 일이죠? 예수님은 그것 가능하단 거 보여주셨죠.
나: 예수님이 가셨던 그런 사랑의 길을 가는데 참다운 신앙이 있는 것 같아요. 혼자 가는 건 힘들지만, 진정 마음이 맞는 사람과 같이 간다면 한층 더 수월하겠죠.
Park: 어쩌면 Tolerance는 사람의 힘으로는 얻기 어려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 아닐까요. 기도가 필요한 듯해요. 오늘 감사했어요.
제 꿈이 '좋은 교사잖아요." 아이들에 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할수록 교육 효과가 높더라구요. 그래서 많이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요.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지만 오늘 감사했어요.
나: 돈벌이에 급급한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져가는 요즘, 아이들을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진정 훌륭한 교사시네요. 꼭 좋은 교사가 되시길 기원할게요.
Park: 원상님도 연구 생활, 신앙 생활에서 늘 기쁨과 행복 느끼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바로 그 '좋은 교육'때문에 생긴 가치관의 충돌이라 제겐 핵심 가치 영역이어서 충돌 과정에서 제가 tolerance 잃을까봐 걱정하고 있나봐요. 기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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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1/23 23:10
종교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왜냐면 종교 내지는 가치관이 그 사람을 이끌어가는 궁극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내 가치관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알라'라고 하든 '상제'라고 하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 분에게 순종하려는 열망이 나를 지금까지 인도해 왔다.
이러한 열망에 반하여 나의 삶은 매우 방탕했고 거짓과 죄악으로 가득했다.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죄악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왔고, 때론 하나님을 저버리고 내 욕망대로 살아가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흔들리고 쓰러져 가는 나의 손을 수백번이고 잡아주셨음을 나는 안다. 하나님은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나를 지금까지 인도했던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셨다. 비록 생소한 민족종교에서 헤매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셔서 나를 인도하는 지팡이가 되어 주셨다.
지금 나는 예수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참답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니다. 아직도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 부족한 사람에 불과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믿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는 그저 사람이 만든 단체일 뿐인 까닭이다.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이 사회에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저지른 죄악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흔히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같은 종파에 소속됨으로써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있구나' 라고 안도감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종파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나는 예수님을 믿지 교회에서 정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교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생명의 가르침이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복음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천국에 가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것을 잘못 해석한다.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모조리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말한다. 천만의 말씀! 오히려 비기독교인보다 예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먼저 지옥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를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5~20)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과 예수님을 초월한 분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일진대, 어찌 그 분의 말씀이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에만 존재한단 말인가? 만약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성경은 거짓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전지전능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셨지,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나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만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심지어 자연과 우주 속에서도 하나님은 존재한다. 최근 교황이 최근 인기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하여 자연숭배사상을 조장한다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자연을 다른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참다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인가!
따라서,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도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면서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로 통하는 것인 까닭이다. 이슬람의 알라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다른 신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도나 이슬람교도라 하더라도 예수의 복음을 받이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볼진대, 어찌 '"내 종교가 옳다 당신 종교는 틀리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종교는 말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만 말할 뿐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내가 예수를 믿고 그 분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의 말씀만이 진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른 종교의 가르침보다 예수의 가르침이 가장 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며 그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구원의 길을 알려 주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2~1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흔히 신앙과 직업, 일상생활을 분리해 놓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는 그저 삶의 한 부분이며, 그저 취미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나 성당을 인맥을 넓히는 사교장으로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 종교는 그저 마음의 안정을 주는 도구일 뿐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그들의 말 그대로 취미이며, 사교장이요, 정신안정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참다운 신앙은 내 머리가 되어 나를 움직이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하며,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내 일상생활에 방해가 될 때는 신앙을 뒤로 미뤄두고,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나 더 큰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는 않는가? (사실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아왔다.)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은 진정 큰 축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죄악 속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고백한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그런 참다운 제자가 되고 싶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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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1/11 22:1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33)
하나님이 삶과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삶은 몸은 살아 있으나 이미 영적으로는 죽은 시체나 다름없다. 나의 일이 있기 전에 가정이 있고, 가정이 있기 전에 세상이 있으며, 세상이 있기 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계신 까닭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함으로써, 내가 하는 모든 일과 가정이 참되고 올바르게 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 먼저 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양식과 필요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될 것이다.
오늘도 놀라운 경험을 했다. 창고문을 튼튼한 열쇠로 잠그려고 일단 임시로 자전거 열쇠를 문고리에 끼워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키를 돌려도 열쇠가 풀리지 않았다. 5분동안 씨름을 한 끝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열쇠가 열리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한마디 기도를 한 즉시 열쇠가 바로 스스르 풀렸다. 이럴수가!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 해 주셨음을 믿는다. 아주 작은 일에서조차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시고 나의 작은 일까지 간섭하시며 내 삶을 인도하여 주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은 삶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이기도록 하는 큰 힘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 막데부르그로 인도하셨듯이, 이 곳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도록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
내 온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복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하자.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나를 연결해주는 훌륭한 통로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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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1/09 00:25
하나님께서 때로 시련이나 어려운 일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심을 종종 느낄 때가 있다. 최근 수차례 물건을 도둑맞으면서 계속 원망만 쌓아왔지만, 이러한 일들 속에서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과 죄악을 깨닫게 하시고, 썩어가는 육체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불과 며칠 전에 "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기"라는 글을 통하여, 이러한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로부터 물건을 다시 도둑맞게 되었다. 지하실에 두었던 아내의 여행용 가방이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한 달 전에도 내 여행용 가방이 없어진 상태였다. 결국 우리는 창고에 정기적으로 들락거리는 도둑이 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자전거 부품을 훔쳐간 도둑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창고라니! 더구나 아욱스부르크(Augsburg)에서도 상당히 많은 물건들을 도둑맞았던 터였다.
아무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지만 왜 이런 일이 계속 나에게 생기는 것일까? 나는 화가 났지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5:38~44)을 상기시키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마음은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두려움은 더해만 갔다.
"지금은 그저 작은 물건을 훔쳐가는데 지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고 해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모든 두려움은 바로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누군가가 나의 물건을 빼앗아가고 나를 해하려 드는 것을 두려워할까? 그것은 바로 육체에 대한 집착과 욕심 때문이 아닐까? 가령, 누군가가 내 물건을 빼앗가가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면, 그 물건이 내 소유라는 집착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어느 물건도 내 고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또, 누군가의 모욕과 조롱으로 인해서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내 안에 그릇된 자만감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 육체를 해하려 하는 것을 두려워 함은 내 육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렇듯 타인이 내 육체에 주는 피해는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면서, 정작 온갖 사악하고 더러운 생각과 행동으로 나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일에는 아무런 죄책감이나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쳐가거나 나를 모욕할 때는 그에게 큰 분노를 느끼면서, 돌아서서는 여인의 육체를 탐닉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누군가를 깔보고 무시하며 양심을 속이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곤 한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인가!
타인이 아무리 내 육체를 해하더라도 그들은 내 영혼에 털끝만큼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 내 영혼을 더럽히고 망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 물건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은 바로 나 자신이 내 영혼에 저지르는 폭력이 아닐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저 나를 모욕하고 조롱했던 사람,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원수, 내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대단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 자신의 영혼에 가하였던 지난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풍성한 복과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내 재산이라고 여기고 물질적인 욕심에 사로잡혔던 지난 날, 여인을 그저 내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지난 날, 선한 척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거짓말과 사악한 행동을 하는데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던 시간들...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입혔으며 내 영혼을 수도 없이 때리고 상처를 입혔는지 모른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함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35)"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그가 없었다면 평생 내 죄를 참으로 회개하지 못하였을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원수야말로 나의 큰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진정 나의 교만과 정욕, 그릇된 자만심,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던 지난 날들을 진정 회개하자. 뜨거운 회개의 눈물로부터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샘솟는 그런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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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10/01/03 20:53
2010년 경인년을 가족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새해에는 우리 가족, 이웃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과 정신적 빈곤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큰 축복을 주시기를 기원한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새해 첫 날이 되는 자정 0시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아내도 그 순간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0시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 벨이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아내가 수화기를 받으니, 어느 독일인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새해 복 많이 받아요"라고 말했다. 인사는 고마웠지만, 아기가 잠을 자고 있는 늦은 시간에 요란스럽게 하는 것이 조금 불쾌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새벽 2시까지 계속 벨이 울리는 것이었다. 다른 집에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2시까지 계속 벨을 울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다. 다음 날 밖에 나가보니, 내 자전거의 안장은 부서져 있고, 바퀴의 바람은 빠져 있고 자전거에 부착된 바구니도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누군가가 자전거의 바람을 빼 놓고 간 것은 5개월만에 3번째다. 이상한 것은 주위에 놓인 다른 사람의 자전거는 멀쩡하고 내 자전거만 그런 일을 계속 당한다는 것이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새해 둘째날 밤에는 위층에 사는 젊은이들이 친구들을 초대해서 새벽 12시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쿵광쿵광 하는 소리가 너무 심해서, 올라가서 소리를 줄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잠시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시끄럽게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올라가서 똑똑 두드리니 이젠 문도 열지 않았다. 계속 두드리니, "또 중국인이 왔군"이란 말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소리가 너무 큽니다. 조심해 주세요"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알겠다고 말하고 음악을 껐다. 하지만 여전히 왁자지껄 하는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왜 두 번이나 주의를 주었는데도 무시하고 그렇게 떠들썩대는 것일까?
비록 직접적인 단서는 없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아시아인을 골탕먹이려는 의도적인 행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크게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 독일인들에 대한 분노감에 사로잡혀 나도 이들에게 똑같이 복수할까도 생각해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거예요"라는 아내의 만류에 마음을 접었다. 복수라는 유치한 생각을 했던 내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이웃 독일인들이 아시아인을 조롱하려는 의도로 일부러 우리에게 그러한 불쾌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미움으로 대하고 똑같이 복수하겠다는 태도로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님께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잦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엿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 6:39~45)
먼저 나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내 물건을 훔쳐가거나 나를 조롱하더라도, 그들을 한 형제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조롱과 고문 속에서도 그들을 용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악을 악으로 갚기 보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억울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먹을 음식과 집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 전쟁의 공포 속에서 떨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세계 도처에 많이 있다. 자전거 하나 망가졌다고 투정부리기보다 고통받는 이웃들을 걱정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국제 아동봉사단체인 Reaching Hearts for Kids의 설립자이자 운영자인 나의 존경하는 친구 Norma Nashed씨는 병환으로 고생하면서도 크리스마스 기간 중에 외롭게 지내는 고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이처럼 예수님을 따라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 속에서 세상은 더욱 밝아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2010년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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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09/12/25 22:13
우울했던 작년 크리스마스. 변변찮은 수입이 없던 당시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가족과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질 않았었다. 작년 여름 큰 희망으로 첫 발을 내디딘 독일 박사과정 유학이었지만, 시작부터 우리에겐 가시밭길이었다. 인터뷰까지 통과되어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독일정부 장학금을 마지막 심사에서 탈락하여 끝내 받지 못하게 되었고, 당장 먹고 살 미래를 걱정해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렸던 까닭이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보냈던 시간들, 답답하기만 한 처지, 가족과의 불화 등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한동안 공부와 연구에서 손을 놓기도 했다. 매섭도록 추웠던 작년 겨울은 내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가족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주님까지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하나님! 실컷 기도해 보았자 제 소원은 들어주시지 않는군요. 오히려 너무나 뼈아프고 괴로운 시간들만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이젠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단 그냥 닥치는대로 살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원망했는데도,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던 내게 다가온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따스한 손길을 잊을 수가 없다. 몇몇 교우들이 종종 찾아와 음식을 나누어 주거나 식사에 초대해 주었다. 특히, 아욱스부르그 한인교회 목사님께서 베풀어 주신 따스한 조언과 사랑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내는 "우리의 꿈과 소망을 하나님께서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거예요. 할 수 있는데까지 새로운 자리를 잡아봐요"라고 말하며 나를 강하게 독려해 주었다. 유럽에서 자리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알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아내의 신념에 찬 격려에 내 마음 속에서도 "그래, 이제 밑져야 본전이다.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몇달동안 이를 악물고 닥치는대로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연구직을 알아보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는 연구소 및 대학원으로부터 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7월말까지도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고 오히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더 좋은 연구소의 고용 제의를 기다리기 위해 다른 곳의 제의를 거절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연구소에는 결국 합격하지 못하여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받았던 모든 소중한 기회를 아쉽게 버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역전이 일어났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기회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할렐루야! 밑져야 본전이니 처음 제의를 받았던 연구소에 다시 한번 연락해 보자는 아내의 제안이 성큼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연락해 보았다. 놀랍게도 연구소 측에서는 언제든지 나를 대환영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나는 이제 독일에서 정식 연구원으로서 일하고 있다. 처음에는 연구주제조차 생소하여 마음에 썩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의 연구과제가 향후 미래 과학을 이끌어 갈 전망있는 분야라는 확신이 들고 있다. 또한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족하지 않게끔 우리를 채워주시고 우리 가족을 더욱 더 넘치는 사랑과 화목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야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나의 부족함을 고치고 나의 달란트에 적합한 더 나은 내일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랍고 빈틈없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받은 올해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나 달콤하고 행복하다. 지금 나는 연구원으로서 사랑스러운 가족과 평안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지난 역경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아직 내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영성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7:33) 지난 8월 막데부르그에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내 마음에 일어난 큰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은지는 3년 정도 되었지만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진리가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지는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러한 느슨한 신앙의 문제점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신 분은 할레 한인교회의 목사님이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6-7,12-13)
하나님의 종이 되라! 그렇다.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무엇을 하든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한다. 죽어가고 썩어가는 내 영혼을 구원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아니었던가!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절규했던 나를 이렇게 살려주시고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주신 분, 어찌 그 분의 종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분의 종이 된다는 것은 곧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새해 2010년에는 주님이 내 영혼의 중심에 계시는 "성령 충만의 해"가 되도록 하고 싶다. 성령이 내 마음에 충만하고 내 삶을 지배하여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드리며 이웃들과 진정한 사랑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싶다. 나의 직업과 다른 일들은 그 다음 순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는 연구도, 가정에서의 일도, 다른 봉사도 모두 하나님과 주님께 드리는 성스럽고 거룩한 것이 되도록 하고 싶다. 그리하여 내 삶을 통하여 이웃과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그러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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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09/03/09 03:04
오늘 주일예배 말씀은 "인생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제목이었다. 왠지 듣기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제목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2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를 궁극적인 선으로 이끄시려는 데 있다는 것이 설교말씀의 요지였다. 때로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우리 마음 속에 사랑과 선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고진감래 등 세계적으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라는 격언과 속담은 아주 많다. 하지만, 막상 시련을 겪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주변 상황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합리화하기에 바쁘다. (바로 나 자신이 그랬다~) 시련을 이겨내기가 그만큼 어렵기에,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금껏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제가 겪어왔던 시련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의 시련은 없게 하여 주시고 어서 축복을 내려주시고 성공의 길을 보여주소서."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기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주시는 시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러한 사랑과 선을 저의 마음과 육체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게 하여 주소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억울하게 하거나 화를 내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성장시키려는 기회구나' 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하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일이 잘 풀리기만 하고 편안하기만 하다면, 어떻게 내면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러고보면, 시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불렀던 찬송 중에 이민섭의 "축복의 통로"라는 찬송가가 제일 기억이 남는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여기서 '당신'을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바꿔보는 것도 좋은 시도일 것 같다. 그들이 평소 좋았건 싫었건 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주문처럼... ㅋㅋ
다음은 성가대의 찬양과 이동훤 형제의 특별찬양 동영상이다.
감사해요 - 윤민제 편곡 (성가대 찬양)
주님 사랑 온누리에 (이동훤 형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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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묵상 에세이 2009/03/06 18:31
누구나 삶을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는다. 지금 내게도 찬 바람 쏠쏠 부는 시련의 시기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시련의 원인이 자신 또는 외부적인 상황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필 내가 왜 이런 상황에까지 처해야만 했을까?" "왜 그 사람은 내게 인정머리 없게 대하는 것일까?" "나의 성격은 왜 이 모양일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동일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서 하기도 한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궁지로 모는 것일까? 언제 내게 더 나은 기회를 주실까?"
오늘 읽었던 조엘 오스틴(Joel Osteen)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서 다시 한번 마음의 힘을 얻게 된다.
유혹과 시련이 찾아오는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해지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목적은 상황이 아닌 우리 자신을 바꾸시는데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 빨리 협력할수록 혼란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다. 재빨리 교훈을 받아들이고 나쁜 태도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면 영적 여행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
우리의 인생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상황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거친 모서리를 둥글게 깍아내기 위해 주시는 시험을 뿐이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다. 사실 나 자신도 안정적인 삶보다는 도전하고 성장하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작 시련이 닥쳐오니 내 머리 속에는 주위 상황에 대한 온갖 불만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통하여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며, 한편으로는 직업에서 더 큰 기회를 주시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스틴의 말대로, 내가 이러한 시련에서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주위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연구자로서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인도해 주심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다. 벌써 내게는 기회의 징조가 다가오고 있다. 조엘 오스틴의 책을 통해서, 사랑, 용서, 희망, 긍정에 대해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연구의 방향이 점점 질서를 잡아가며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오스틴은 또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박국 2:3)
아무리 응답을 달라고 기도해 보았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는 때는 정해져 있다는 거다. 다만, 그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틴의 언급과 같이 어짜피 기다려야 할 바에야 즐기면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전에 필요한 것들을 먼저 갖추어 놓도록 나 자신을 바꿔나가는 것이다. 시련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킴으로써 더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살아가자는 거다. 군대에서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이 있다.
시련의 시간들을 기쁨으로 이겨내자.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옛 고사성어는 참으로 인생의 소중한 교훈이다. 나를 더욱 더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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